다 읽고 나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프롤로그 첫 장부터 처음 읽었던 그 때와 지금이 이렇게 다르다니...

사건의 전말을 알기 전과 후.

그럴 결심은 아니었는데.. 결국 끝까지 다시 읽어버렸네.. :)

놓쳐버린 연결고리(내 부족함이지만;)를 발견할 때마다 작은 보물은 발견한 것 같았다.

거기서 왜 웃었는지.. 왜 그랬는지... 이유 없는 대목은 없었다.

글에서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실천하듯이..

 

후쿠오카 형무소 죄수, 글쟁이, 예수쟁이 윤동주와

형무소 간수, 검열관 와타나베 유이치, 스기야마 도잔.

책을 읽으면서 난 와타나베 유이치였다가 스기야마 도잔이기도 했다..

그들처럼 윤동주에게 빠져서.

그리고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책과 시집을 읽어봤다면...

나도 그들 속에 섞여 공감하거나 내 나름의 생각과 비교할 수 있었을텐데…

 

<1권>

p.9) 삶에는 이유가 없어도 좋다. 그러나 죽음엔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 죽음, 그 자체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위해서. 열아홉 살의 겨울,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지금의 내가 되었다.

p.63) 증오는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p.162) “드러난 사실의 이면에 진실이 있다.”
시적 상징을 이해한다는 것은 글을 읽을 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운율 속에 숨은 의미를 읽는 법은 시를 읽고, 배우고,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p.167) “가장 중요한 건 첫 문장이에요. 첫 문장을 제대로 쓰면 마지막 문장까지 쓸 수 있어요.”

p.179) “나 자신을 믿기 위해 신을 믿는 거예요.”

p.190) “어차피 한쪽에다 걸어야 한다면 희망에다 걸게. 절망에 걸어도 남는 것은 더 큰 절망뿐일 테니까.”

p.220) 어떤 책을 읽은 사람은 그 책을 읽기 전의 사람이 아니다.

<2권>

p.20) 모든 일은 일어날 어떤 일의 전조다. 시간은 그 자체로 완결되지 않고 사건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다. 모든 행위는 다가올 운명을 위해 복무한다. 그것이 기막힌 행운이든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갈 불운이든. 문제는 그 전조를 예감할 수 없다는 것이다.

p.131) "난 이곳에 갇혀 있지 않아요. 이곳에 살고 있을 뿐이죠."

p.140) 추억이 많으면 그것을 잊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추억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추억 그 자체만으로는 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추억이 우리들의 몸속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몸짓이 되고, 이름도 없이 우리들 자신과 구별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몹시 드문 시간에 시의 첫마디가 그 추억 가운데에서 머리를 들고 일어서 나오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말테의 수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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