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으로 태어나 일본인으로 자랐고 미국인으로 여생을 산 한 남자, 프랭클린 하타의 이야기다.  사람들 안에서 거스르지 않고 모나지 않게  속하려 했다.

미혼 남성으로 살면서 입양기관을 통해 한국인 여자아이를 고집했다. 그리고 과거 전쟁 중에 군의관으로 지내면서 목격한 위안부의 실상, 그 중 특별한 인연을 가진 '끝애'와의 이야기가 나온다. 미친 일본군의 잔인한 행동들...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지만 왜 한국인 여자아이를 고집했는지 짐작을 하게 했다. 죄의식.. 딸에게 모든 혜택을 주는 것이 의무인 것처럼.. 하타는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라고 하지만 그런 관계 속에서 딸도 아버지의 사랑이 채워지지 않기에 자기 삶이 아닌 상처를 받고 주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살았다.

하타의 삶을 따라가면서 그의 입장으로 들어가지지 않았다. 속을 내보이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의 속을 보려하지 않으니까... 서니의 반항과 떠남, 메리 번스가 이별을 선택한 것. 그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하타를 탓하거나 미워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까.. 다시 돌아온 서니는 그런 하타라는 걸 받아들인 거 같다.

그동안 쌓아올렸던 것을 정리하며 하타는 자유로와 지길~ 자신으로 살길~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비뚤어진 태도를 보일 수 있고, 심지어 충격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이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보여 주는 모습 중 무엇이 진정하고 핵심적인 것인지, 또 무엇이 어느 모로 보나 비정상 적인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순간적인 실수인지 아닌지를 분별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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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뭘 '본다' 해도 내가 보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그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내가 만든 것인지, 아니면 그 중간쯤으로 우리가 삶에 기대하는 것 때문에 만들어 놓고 공유하는 환상인지. 아니면 이렇게 묻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최대한 버텨 내고 만족하는 목적에 부여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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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번스에게 내 감정을 이해시킬 기회를 한 번 더 달라고 했을 때 그녀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떠올랐다. 당신은 늘 노력을 해요, 프랭클린. 하지만 지나치게 열심히 하죠. 마치 나를 사랑하는 것이 당신이 맹세한 의무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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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자 하나가 스물, 아니 심지어 서른 명까지 남자와 관계를 갖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로 인한 모욕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울 터였다. ... 여자는 거의 걷지도 못했으며... 걷잡을 수 없이 피가 쏟아졌다. .. 감염이 되었거나 죽을병에 걸렸을 때만 위안소에서 나오게 하고, 다른 경우에는 낭비를 최소한으로 줄인 치료를 한 뒤에 마쓰이 부인에게 돌려보내라고 지침을 내렸다.
314-315

새로운 영역으로의 이동이 아무리 자동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라 해도, 또는 결국은 그렇게 되었다 해도, 늘 생존의 압박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 이 매섭고 치명적인 존재 조건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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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란 것은 큰 집단을 이루는 것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척'뿐인 삶 이상의 어떤 것을 가지고 그 과정을 마치는 것이었다. ... 사실 무시무시한 것은 우리가 중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전쟁 기계에 우리 자신을, 또 서로를 먹이로 내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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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어디에도 어느 때에도 정말로 살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미래를 위해 산 것도 아니고, 과거에 산 것도 아니고, 현재에 산 것은 더더구나 전혀 아니다. 오히려 망각이라는 외로운 꿈속에, 한 박동에서 다음 박동으로 무에서 무로 흘러왔다. 사실 이것이 가장 비정하게 앞길을 정해 가는 것이다.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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